마르탱 뤼크 위앵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르탱 뤼크 위앵은 프랑스 출신의 천주교 사제이자 순교자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선교사가 되기를 희망하여 1864년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65년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하던 중,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고문과 심문을 받았다. 같은 해 3월 30일,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등과 함께 갈매못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1968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선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 - 김대건
김대건 안드레아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이자 순교자로, 천주교 신앙을 가진 가문에서 태어나 사제의 길을 걸으며 마카오와 필리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26세에 순교하였고, 그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조선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 -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
프랑스 출신 로마 가톨릭 주교이자 조선교구 사도대목구장이었던 안토니 다블뤼는 1845년 한국에 입국하여 선교 및 문서 선교에 기여, 주교 서품 후 사도대목구장을 이어받았으나 병인박해 때 순교, 1984년 시성되었고 그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선교사 -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
프랑스 출신 로마 가톨릭 주교이자 조선교구 사도대목구장이었던 안토니 다블뤼는 1845년 한국에 입국하여 선교 및 문서 선교에 기여, 주교 서품 후 사도대목구장을 이어받았으나 병인박해 때 순교, 1984년 시성되었고 그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선교사 - 자크 샤스탕
자크 샤스탕은 프랑스 출신의 가톨릭 사제이자 선교사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중국에서 선교하다 1836년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펼치다 기해박해 때 순교 후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 -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
프랑스 출신 로마 가톨릭 주교이자 조선교구 사도대목구장이었던 안토니 다블뤼는 1845년 한국에 입국하여 선교 및 문서 선교에 기여, 주교 서품 후 사도대목구장을 이어받았으나 병인박해 때 순교, 1984년 시성되었고 그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 - 조아킴 부베
조아킴 부베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 청나라에서 활동하며 강희제의 총애를 받은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이자 학자로,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치고 외교 사절 역할을 수행하며 동서양 문화 교류에 기여했고, 라이프니츠에게 이진법 연구에 영향을 주었으며, 중국례 논쟁에 참여하고 『강희제전』을 저술했다.
마르탱 뤼크 위앵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위앵 마르티노 루카 |
프랑스어 이름 | Martin Luc Huin |
출생일 | 1836년 10월 20일 |
사망일 | 1866년 3월 30일 |
축일 | 9월 20일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 | |
출생지 | 프랑스 오트마른 기용벨 |
사망지 | 한국 충청도 갈매못 |
직업 | 사제 순교자 |
시복일 | 1968년 10월 6일 |
시복인 | 교황 바오로 6세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매장지 | 절두산 순교성지 |
2. 생애
1836년 프랑스 오트마른주 랑그르 교구 기용벨 마을에서 독실한 천주교 신자 부모 아래 아홉째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보통 뤼크라고 불렸다. 그의 부모는 포도 농사를 지었으며, 아버지는 가문이 대대로 사제를 배출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위앵의 본당 신부는 그의 사제로서의 소질을 발견하고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라틴어를 가르쳤다. 1851년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고, 삶의 수행 또한 철저했다. 그의 유일한 단점은 너무 감성적이라는 것이었다.
위앵은 사제 수업을 받으며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 고향 근처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많은 선교 주교들로부터 해외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선교사의 열망이 더 커졌다.
1861년 6월 29일, 위앵은 사제 서품을 받았다. 보좌 신부로서의 업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지만, 선교사가 되겠다는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선교사가 되겠다는 뜻을 밝혔고, 주교는 이를 허락했다. 다만, 주교는 위앵에게 후임자가 도착하는 1863년까지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다.[1]
1863년 6월, 위앵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고, 8월에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64년 7월 15일 아홉 명의 선교 사제들과 파리를 떠나,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와 함께 1865년 5월 27일 조선 충청도 내포에 도착하였다. 7월 18일까지 다블뤼 주교와 내포에 머물다 합덕 세거리로 이동하였다. 위앵 신부는 조선 생활 방식과 조선말을 빠르게 익혀, 1866년 2월부터 고해성사, 교리 교육, 병자성사, 혼인성사 등을 집전하였다. 조선 천주교인들은 그의 활동에 크게 기뻐했다. 위앵 신부는 500회 이상의 고해성사, 약 20명의 병자성사, 몇몇 부부의 혼인성사를 집전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자, 위앵 신부는 오메트르 신부와 함께 자수하여 3월 12일 체포되었다.[1] 3월 19일 세 선교사는 모두 한양의 감옥으로 압송되었다.[1] 위앵 신부는 극심한 심문과 고문을 받은 뒤, 1866년 3월 30일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와 함께 충청도 보령 갈매못으로 압송되어, 장주기 요셉, 황석두 루카 등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1] 순교 당시 위앵 신부는 "제가 죽는 것은 슬프지 않으나, 사랑하는 조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슬픕니다."라고 말했다.[1] 그의 나이 31세였다.[1]
2. 1. 출생과 성장
1836년 프랑스 오트마른주 랑그르 교구 기용벨 마을에서 독실한 천주교 신자 부모 아래 아홉째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보통 뤼크라고 불렸다. 그의 부모는 포도 농사를 지었다. 그의 아버지는 가문이 대대로 사제를 배출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위앵의 본당 신부는 그의 사제로서의 소질을 발견하고,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라틴어를 가르쳤다. 1851년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그는 삶의 수행 또한 철저했다. 그의 유일한 단점은 너무 감성적이라는 것이었다.2. 2. 선교의 열망
위앵은 사제 수업을 받으며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 그는 고향 근처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많은 선교 주교들로부터 해외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선교사의 열망이 더 커졌다.1861년 6월 29일, 위앵은 사제 서품을 받았다. 보좌 신부로서의 업무를 훌륭히 수행하였지만, 선교사가 되겠다는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선교사가 되겠다는 뜻을 밝혔고, 주교는 이를 허락했다. 다만, 주교는 위앵에게 후임자가 도착하는 1863년까지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다.[1]
2. 3. 조선 선교
1863년 6월, 위앵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고, 8월에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64년 7월 15일 아홉 명의 선교 사제들과 파리를 떠나,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와 함께 1865년 5월 27일 조선 충청도 내포에 도착하였다. 7월 18일까지 다블뤼 주교와 내포에 머물다 합덕 세거리로 이동하였다. 위앵 신부는 조선 생활 방식과 조선말을 빠르게 익혀, 1866년 2월부터 고해성사, 교리 교육, 병자성사, 혼인성사 등을 집전하였다. 조선 천주교인들은 그의 활동에 크게 기뻐했다. 위앵 신부는 500회 이상의 고해성사, 약 20명의 병자성사, 몇몇 부부의 혼인성사를 집전하였다.2. 4. 체포와 순교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자, 위앵 신부는 오메트르 신부와 함께 자수하여 3월 12일 체포되었다.[1] 3월 19일 세 선교사는 모두 한양의 감옥으로 압송되었다.[1] 위앵 신부는 극심한 심문과 고문을 받은 뒤, 1866년 3월 30일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와 함께 충청도 보령 갈매못으로 압송되어, 장주기 요셉, 황석두 루카 등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1] 순교 당시 위앵 신부는 "제가 죽는 것은 슬프지 않으나, 사랑하는 조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슬픕니다."라고 말했다.[1] 그의 나이 31세였다.[1]3. 시복 · 시성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3]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4] 1984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newsaints.fai[...]
[2]
웹사이트
한국 천주교 절두산 순교성지 성인 유해실
http://www.jeoldusan[...]
[3]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5-01-04
[4]
뉴스
교황 "순교자 유산, 세계 평화·인간가치 수호에 이바지할 것"
http://www.hankyung.[...]
한국경제 디지털 신문
2014-08-1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